주오구 니혼바시가부토초 제일국립은행 터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 경제계의 근대화에 힘쓴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이 무사의 시대에서 근대국가로 발전하려 하였을 때 그 재능을 발휘한 것이 시부사와 에이이치였습니다.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840년 2월 13일 무사시노 국 한자와 군(지금의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시부사와의 집은 양봉을 하거나 쌀, 채소 등을 생산하는 농가였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농가가 아니라 상인들과 거래도 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주판으로 계산을 하였고 14세에는 매입을 위해 신슈 지방에 가기도 하는 등 장사 감각을 익히며 자랐습니다. 이 경험이 시부사와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하지만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계산이나 장사뿐 아니라, 5세에 글을 읽고 7세에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에도에서는 검술을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반도쿠가와파의 무사들과 교우관계를 맺게 됩니다.한때는 반도쿠가와파의 사상에 영향을 입었지만 이후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모시게 됩니다. 요시노부의 부하로서 파리의 만국박람회를 시찰하며 선진적인 유럽 문명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인이 생각하는 외국인 배척은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여 외국에서 배워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이때, 시부사와가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회사였습니다. 여러 회사가 설립되어 경쟁해나가는 동안 국력도 발전할 것이라 느낀 것입니다.도쿠가와 정권이 멸망하고 신정부가 수립된 후,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로부터 ‘이제부터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라는 말을 들은 뒤 독립하였습니다. 그리고 1869년, 시즈오카에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대로 민간인으로 살아가려 하였지만, 신정부에서 경제 감각이 뛰어난 그를 불렀고, 시부사와는 일본의 경제정책 입안, 추진하는 대장성(지금의 내무성)에서 일하게 됩니다.은행 설립의 기초가 되는 조례를 제정한 뒤, 대장성을 그만두고 다시 민간으로 돌아와 복수의 회사를 설립합니다.제일 국립은행(지금의 미즈호 은행)의 대표로 취임하였고 수많은 지방 은행 설립에 협력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도쿄 가스, 오지제지, 도쿄 해상화재, 데이코쿠 호텔, 기린 맥주, 삿포로 맥주, 게이한 전철, 도쿄증권거래소 등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설립에 관여하였습니다. 그가 관계된 회사만 해도 500사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이렇게 민간 기업 설립으로 인해 일본의 근대화는 극적으로 진행됩니다. 일본 경제계를 이끈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이야기를 본편에서 즐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