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토구 마루야마 고분
55세에 시작하여 도보로 일본 지도를 만든 남자 이노 다다타카
55세에 도보로 근대 일본지도를 만든 남자 이노 다다타카
나이가 든 뒤 더욱 왕성히 활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나이가 들면 모험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일도 점점 보수적으로 처리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이가 든 뒤 더욱 왕성히 활동하는 사람은 젊은 사람에게 지지 않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거나 일의 성과를 내곤 합니다.일본에서 이런 사람이라고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것이 이노 다다타카입니다. 이노 다다타카는 50살을 넘긴 뒤 막부 천문학의 대가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제자로 들어가 그 뒤 71살에 일본 전국을 걸어 다니며 일본 지도를 완성한 사람입니다.이렇게 우수한 사람이 왜 젊은 시절에는 출세하지 못했을까요? 왜냐하면 젊은 시절의 이노 다다타카는 가즈사(지금의 지바현의 일부) 사하라 지역의 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하라는 배들이 오가는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에도에 사하라로 많은 물건이 들어와 지방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물건뿐만 아니라 정보 또한 사하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토지인 사하라의 관리를 이노 다다타카가 담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이노 다다타카가 활약하는 것은 1783년 천명의 대기근 때입니다. 이 해에는 아사마야마라는 산이 분화하여 각지에서 불모작이 예상되었습니다. 이노 다다타카는 가격이 오르기 전에 간사이 지방에서 쌀을 사재기하여 사하라로 옮겼습니다. 쌀값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주변에서는 이 타이밍에 쌀을 팔자고 했지만 이노는 거절하였습니다. 이대로 끝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1785년, 쌀 부족으로 쌀값이 순식간에 급등하였습니다. 천재지변에 의한 기후의 불안정이 일 년 만에 끝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이때 이노는 이웃들에게 무상으로 쌀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다른 땅에서 피난 온 사람들에게도 쌀을 주었습니다. 각지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도시부를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흐름은 사하라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쌀을 받은 피난민들이 이노의 집과 마을의 경비를 담당해주었기 때문입니다.이런 시책이 도쿠가와 정권의 귀에도 들어가 이노는 표창을 받는 등 명성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노 다다타카의 은거(은퇴)도 좀처럼 허가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겨우 은퇴 허가를 받은 이노 다다타카. 그의 재능을 온 세계를 위해 사용할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더더욱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노 다다타카의 활약을 본편에서 확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