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토구 아사쿠사 아사쿠사 연예장
비트 타케시의 탄생
희대의 엔터테이너 <세계의 기타노>가 선택한 길
영화감독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타노 타케시는 원래 코미디언으로 커리어를 시작하였습니다. 코미디언일 때에는 ‘비트 타케시’라는 예명을 썼기 때문에, 지금도 비트 타케시와 기타노 타케시라는 이름을 나눠 씁니다.일본에서는 다모리, 산마와 함께 3대 코미디언으로 유명합니다. 비트 타케시가 인기를 끌었던 것은 공격적인 개그를 시작했을때 였습니다.1980년대에 만담 붐이 일어났을 때 비트 타케시는 독설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할배탕구, 할매탕구 등 심한 표현을 사용하며 과격한 개그를 하였기에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결코 도덕적으로 훌륭한 개그는 아니었지만 고상한 척 하는 개그보다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과 법에 거슬리는 부분을 사용하여 많은 팬을 얻은 것입니다.콩트 중심의 안정적 인기를 자랑한 티브이 프로그램 ‘드리프터즈’에 대항하여 만든 ‘우리들은 까불이 족속’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비트 타케시가 중심이 되었고, 일본 시청자들은 드리프터즈파, 까불이족속파로 나누어지며 전국적으로 큰 유행이 일어났습니다.그 외에도 예능인으로서 많은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았습니다. 개그뿐만 아니라 여러 재능을 발휘하여 흔들리지 않는 인기를 얻은 것입니다.지금은 코미디뿐 아니라 예능계 전체의 거물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비트 타케시이지만 예능 활동이 처음부터 잘 풀렸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무명시절이 길어서 고생했다고 합니다.비트 타케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메이지대학 이공학부에 진학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공계의 기술을 손에 넣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비트 타케시는 대학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에도 잘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그리고는 신주쿠에 있는 재즈카페의 웨이터로 활동하며 재즈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해체공사, 택시 운전, 공항 짐운반 담당 등의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찾기 위한 청춘의 나날들을 보냈던 것입니다.많은 학생이 열광했던 학생운동도 끝물에 이르고, 비트 타케시도 본격적으로 뭘 하며 먹고 살지를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가 목표로 정한 것이 예능이었습니다. 이공계라 연극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예능이나 코미디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 또한 수월친 않았습니다.일본이 자랑하는 비트 타케시의 탄생 비화,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