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다구 료코쿠 료코쿠바시
복수 전야 료코쿠바시에서의 만남. 오타카 겐고.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복수 전야, 한 명의 사무라이가 옛 친구를 만나다
도쿄 스미다구 료고쿠와 도쿄 주오구 히가시니혼바시를 잇는 다리, 료고쿠바시. 이 다리가 걸쳐져 있는 스미다가와 강을 경계로 무사시노 국과 시모사 국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두 나라에 걸쳐져 있는 다리였기 때문에 료고쿠바시(두 나라 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이 료고쿠바시는 유명한 가부키 작품 <주신구라>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주신구라는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입니다. 1701년 3월 14일, 에도성 소나무 복도에서 아코(지금의 효고현 아코시)의 영주 아사노 다쿠미노카미가, 기라 고즈케노스케를 습격하여 부상을 입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쓰나요시도 살고 있던 에도성 안에서는 이유 없이 칼을 뽑아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 규칙을 어긴데다가 사람의 생명에 위협을 가했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할 큰 죄였습니다. 아사노 다쿠미노카미는 할복을 명 받았습니다. 아코 지방도 멸망했습니다. 아코 지방의 사무라이들은 모실 주군을 갑작스레 잃고 낭인이 되고 맙니다.한편, 기라 고즈케노스케는 그 어떤 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당시 기라 고즈케노스케가 아사노 다쿠미노카미를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무사 끼리 싸움을 하였을 경우 양쪽 다 처벌을 받는다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 사이의 다툼에는 이 규칙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코 지방의 가노(지금의 장관)였던 오이시 구라노스케가 중심이 되어, 기라 고즈케노스케를 공격하여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복수를 행할 계획이 세워졌습니다.복수를 하기로 한 무사 중에 오타카 겐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타카 겐고는 하이쿠의 명인이었습니다. 하이쿠의 거장, 마쓰오 바쇼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다카라이 기카쿠가 특히나 오타카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들과 같은 하이쿠 사범들은 유명한 집안에 초대받아 하이쿠를 짓는 연회를 펼쳤습니다. 오타카 겐고는 하이쿠로 쌓은 인맥을 이용하여 기라 고즈케노스케의 동향을 살피려고 했던 것입니다.오타카 겐고는, 1702년 12월 14일 기라 고즈케노스케의 저택에서 다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1702년 12월 14일 낮. 오타카 겐고는 료고쿠바시 다리에서 행상인인 척 하며 기라 고즈케노스케의 저택을 정찰하였습니다. 료고쿠바시에서 기라 고즈케노스케의 저택이 잘 보였던 것입니다. 그때, 다카라이 기카쿠가 료고쿠바시를 지나갔습니다. 다카라이 기카쿠는 무사의 복장이 아닌 행상인의 복장을 한 오타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오타카가 모시던 아코의 주군이 목숨을 잃은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오타카 겐고가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다카라이 기카쿠는 <도시노세야 미즈노나가레토 히토노미와>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하이쿠에 뛰어난 자들은 하이쿠를 이용하여 인사를 하거나 소통을 합니다.다카라이 기카쿠가 지은 이 시는 어떤 뜻일까요? 또한, 오타카 겐고는 다카라이에게 어떤 답시를 보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