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요다구 구단미나미 니혼대학
일본의 나폴레옹 야마다 아키요시
나폴레옹을 존경한 남자가 만든 대학
프랑스 혁명 후의 혼란을 수습하여 프랑스 황제까지 올라간 나폴레옹. 이 나폴레옹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였기 때문입니다.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자국에 미쳐 왕정이 부정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유럽 여러 나라는 프랑스 혁명 정부를 타도하기 위하여 프랑스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프랑스군을 이끈 나폴레옹은 각국 정부군을 격퇴한 것 뿐만 아니라 외국에 침공하여 프랑스의 영토를 확대하였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웅이 되어 이윽고 정치를 움직일 수 있는 권력까지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이 나폴레옹을 동경한 것이 조슈(지금의 야마구치현)의 무사였던 야마다 아키요시입니다. 야마다 아키요시는, 조슈 지방의 많은 무사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 요시다 쇼인이 세운 학교인 쇼카손주쿠에 입학하게 됩니다. 야마다 아키요시는 다른 생도들에 비하여 특출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특이한 성격으로 생도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야마다 아키요시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은 ‘다른 자들과 다른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야마다 아키요시를 격려해주었습니다. 스승 요시다 쇼인은 1859년, 도쿠가와 정권에게 처형당하게 됩니다.하지만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조슈 지방을 넘어서 반도쿠가와세력을 이끄는 인재가 되었습니다. 야마다 아키요시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야마다 아키요시는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조슈의 군을 이끌었습니다. 이 시대에 조슈에서 최강이라고 일컬어진 것은 기병대였습니다. 기병대라는 것은 무사뿐만 아니라 농민이나 마을 사람들 등 신분과 관계없이 결성된 부대였습니다. 이 기병대의 리더 다카스기 신사쿠 또한 자신의 후계자로서 야마다 아키요시를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야마다 아키요시는 도쿠가와 군을 잇따라 무찔렀습니다. 주변에서는 야마다 아키요시를 ‘천재 용병’이라 칭찬하였습니다. 이 야마다 아키요시가 동경하고 있던 것이 군사적 재능으로 유럽을 석권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었습니다.1868년에 시작된 도쿠가와 정권과의 전쟁에서 조슈를 중심으로 하는 반도쿠가와군이 승리한 후 야마다 아키요시는 신정부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 참가하였습니다. 물론 신정부가 야마다 아키요시에게 기대했던 것은 새로운 군대의 창설이었습니다. 신정부는 야마다 아키요시를 비롯하여 앞으로의 일본을 이끌어나갈 인재들을 선발하여 유럽에 파견하였습니다. 최신 제도를 견학하고 일본에 반영하기 위함이었습니다.야마다 아키요시는 유럽 파견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동경하던 나폴레옹이 태어난 프랑스에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마다 아키요시는 나폴레옹의 용병에 대해 더욱 연구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하지만 이 프랑스 파견은 야마다 아키요시가 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버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야마다 아키요시가 군인으로서의 길을 버린 이유.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