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요다구 황거 사쿠라다문
사쿠라다문 밖의 변
암살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무라이 이이 나오스케
지금의 ‘황거’에는 천황이 살고 있지만, 에도시대에는 ‘에도성’이라 불리며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이 살고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정권이 일본 정치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이곳은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도쿠가와 정권의 노중(지금의 장관)들은 각자의 집에서 에도성으로 출근하며 정치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이 노중들의 의논으로 정치가 결정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몹시 큰 정치문제가 발생하여 급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는 대노(지금의 대통령)가 임명되어 거의 독단적으로 정치적 결정을 하였습니다.대노에 취임한 사람 중 많은 사람이 ‘히코네번(지금의 시가현 히코네시)’의 이이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도쿠가와 쇼군의 신뢰가 두터웠던 가문 중 하나로 도쿠가와 군대의 선봉에 서는 가문이었습니다. 1858년, 이 이이 가문의 당주 이이 나오스케가 대노에 취임합니다.1850년대까지는 해금 정책(쇄국 정책)을 펼쳐 서양제국은 네덜란드와만 교역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이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같은 나라들이 교역을 요구하며 몇 번이고 사절단을 파견해왔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우호적인 사절단 파견이었지만, 각국은 군대 또한 배치하곤 하였습니다. 일본의 군사력과 서양의 군사력이 얼마만큼 차이 나는지 알고 있던 이이 나오스케는 서양제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쇄국정책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당시 일본은 외국과의 교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천황 가문이 크게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중요한 정치 결정을 위해서는 천황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이 나오스케는, 천황 가문의 허가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독단적으로 외국과의 조약을 맺기 시작하였습니다.이이 나오스케의 결단은 당연히 반대파로부터 크게 비난받았습니다. 이이 나오스케는 ‘안세이의 대옥’이라고 불리는 탄압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정책으로 인해 이이 나오스케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 나오스케는 일본을 위해, 도쿠가와 가문을 위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정치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반대파 입장에서는 이이 나오스케야말로 일본을 위험에 빠트리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을 계획하였습니다.1860년 3월, 이이 나오스케는 평소처럼 정무를 위하여 히코네번의 저택에서 에도성의 문 중 하나인 사쿠라다문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