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요다구 유락초역 미나미마치 부교쇼 터
유명한 부교 오오카 에치젠
인정 넘치는 부교 오오카 에치젠
도쿠가와 정권의 수도였던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서민의 인기를 끌었던 마치 부교(행정, 사법, 경찰 담당 장관)가 두 명 있었습니다. 한 명은 지금의 도쿄역 야에스 북쪽 출구 부근에 있던 기타마치 부교쇼의 마치 부교 였던 도야마 긴시로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유라쿠초역 근처에 있었던 미나미마치 부교쇼의 마치 부교 오오카 에치젠 입니다. 이 두 명의 마치 부교에 관한 이야기는 사극에서도 인기 소재입니다.오오카 에치젠은 1677년 에도에서 태어났습니다. 마치 부교가 되기까지 막부의 관료로서 정치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1717년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그를 미나 미 마치 부교로 선발하였습니다.이 오오카 에치젠이 마치 부교로 내린 판결들은 ‘오오카재판’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오오카재판을 유명하게 만든 것이 <오오카 정담>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 수많은 명재판들이 쓰여 있습니다.특히 유명한 것이 ‘삼방일냥손’ 과 ‘어미 정하기’입니다. 어느 날, 미장이였던 긴타로라는 사람이 금화 세 냥을 주웠습니다. 이 돈의 주인은 목수 기치고로였습니다. 기치고로는 이미 잃어버린 돈은 자기 것이 아니라며 그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긴타로 또한 주운 돈을 자기가 가질 순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긴타로와 기치고로는 옥신각신하던 끝에 부교쇼의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오오카 에치젠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기쁜 마음이 들었습니다. 금화 한 냥을 추가하여 긴타로와 기치고로에게 각각 두 냥씩 나눠주게 명령한 것입니다. 긴타로와 기치고로는 원래 서 냥 이었던 것이 두 냥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각각 한 냥씩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오오카 에치젠도 한 냥을 더해주었기 때문에 한 냥 손해 본 것입니다. 세 사람이 각각 한 냥씩 손해를 보았기에, ‘삼방(세사람) 일냥(한 냥) 손(손해)’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어미 정하기’는 여자 두 명이 한 아이를 놔두고 자기가 아이의 진짜 엄마라고 양보하지 않는 상황에 오오카 에치젠이 어떻게 진짜 엄마를 분별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본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하지만 오오카 정담이나 오오카 재판은 대부분이 픽션이라고 합니다. 실제 오오케 에치젠은 명 부교가 아니었을까요? 그렇진 않습니다.마치부교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도쿄도지사와 경시총감, 재판관을 더한 직책입니다. 서민을 상대로 하는 정치, 행정의 중심인물인 것입니다.오오카 에치젠은 에도의 서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기에, 명 부교라는 소문이 돌고 책이나 가부키에서 그의 업적을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오카 에치젠은 마치 부교로 어떤 일을 하였을까요? 서민의 생활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 힘써왔던 오오카 에치젠의 진짜 모습을 엿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