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토구 아오야마 아오야마 스파이럴
너무 일찍 태어나버린 천재 다카노 조에이
너무 일찍 태어난 학자 다카노 조에이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긴 시간 동안 해금정책(쇄국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또한, 도쿠가와 정권은 서양의 학문이 들어오는 것을 꺼려 일본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서양에 관한 정보는 굉장히 한정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도쿠가와 정권은 사람들의 생활과 관련된 분야에서는 서양의 지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1720년,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기독교와 관계없는 분야의 서양 서적 수입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의학이나 농학 등의 분야가 눈부신 발전을 거두기 시작하였습니다.또한, 당시 유럽 국가 중 유일한 교역국이었던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학문이 들어왔기 때문에, 서양 학문을 ‘난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난학을 배운 사람 중 한 명이 다카노 조에이였습니다. 다카노 조에이는 1808년에 태어났습니다. 어른이 된 뒤,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가서 의사 지볼트가 세운 의학 학교 ‘나루타키주쿠’에 입학하였습니다. 다카노 조에이는 원래 의학을 배우기 위해 난학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의학뿐만 아니라 화학과 물리에도 흥미를 느꼈습니다. 나아가서는 병법에도 흥미를 느껴 지식을 넓혀갔습니다.다카노 조에이는 깨닫게 됩니다. ‘이토록 학문이 발전한 서양 제국은 몹시 강할 것이다. 일본도 이런 나라들처럼 강한 나라가 되지 않으면 언젠가 서양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도쿠가와 정권은 일본에 찾아오는 서양배들을 대포로 공격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외국과의 전쟁이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일본도 서양과의 교역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켜 강한 나라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아직 외국과의 교역을 자유롭게 행할 수 없었습니다. 무단으로 외국에 가면 사형에 처하는 시대였습니다.하지만, 다카노 조에이는 이런 상황을 알아버린 이상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사람들이 눈을 뜨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의견을 말하더라도 도쿠가와 정권에 체포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카노 조에이는 소설을 쓰기로 하였습니다.그 소설은, 한 남자가 일본과 외국의 차이점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임을 엿듣고 서양의 힘이 어떤 것인지 알아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마무리 지어집니다. 소설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도쿠가와 정권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이 소설을 읽고 눈을 뜰 것을 다카노 조에이는 바라고 있었습니다.하지만 다카노 조에이는 정치 비판을 이유로 체포되고 맙니다. 하지만, 다카노 조에이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수감중에도 일본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이 걸린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