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오구 니혼바시 고덴마초 직씨 공원
행동하는 학자 요시다 쇼인
사무라이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
1830년, 조슈 지방(지금의 야마구치현)에 요시다 쇼인이라는 훌륭한 사상가가 태어났습니다. 요시다 쇼인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도쿠가와 정권은 요시다 쇼인을 처형하였습니다. 도쿄 주오구 니혼바시 고덴마쵸의 줏시공원에는 <요시다 쇼인 종언 지지>, 즉 ‘요시다 쇼인이 생을 마감한 땅’이라고 적힌 비석도 있습니다.요시다 쇼인은 원래 조슈지방의 군학자(전투 작전을 세우는 자)였습니다. 다른 지역에도 반드시 군학자가 있었지만 요시다 쇼인은 다른 군학자들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행동력’입니다.1842년 중국(청나라)이 영국과의 아편전쟁에 패배하게 됩니다. 그 결과를 알게 된 요시다 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요시다 쇼인이 공부했던 군학은 고대 중국의 병법을 발전시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시다 쇼인은 중국의 군학이 서양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위기감을 느꼈습니다.게다가, 영국이 중국과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해 거대한 무역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지면 어떻게 되는지 요시다 쇼인은 그 사실에 두려워했습니다.이대로라면 일본도 중국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야.’이러한 위기감을 계기로 요시다 쇼인은 여러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손자병법 중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힘과 상대방의 힘을 잘 알고 난 뒤에 전투에 임하면, 어떤 전투에서도 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의 힘과 서양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일본 전국을 여행하였고 1854년에는 일본에 정박한 미 함대 페리호를 타고 밀출국을 꾀하였습니다.하지만, 페리 함대에 몰래 타는 계획이 실패하여 요시다 쇼인은 체포당하게 됩니다. 밀출국은 사형에 처하는 중죄입니다. 하지만 당시 도쿠가와 정권의 지도자 중에 요시다 쇼인의 행동력을 칭찬하고 일본을 위해 행동하려 한 열의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고향 조슈에 귀향 가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고향 조슈에 돌아간 요시다 쇼인은 쇼카손주쿠라고 하는 사설 학교를 열어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요시다 쇼인은 제자들에게 배움의 중요성과 행동의 중요성을 일깨워줬습니다.하지만 도쿠가와 정권의 외압에 패배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등 5개국과 통상 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를 보고 요시다 쇼인은 ‘일본이 식민지가 될지도 몰라’라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그때 요시다 쇼인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요?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