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도 지요다구 기오이초

마지막 검객이 보여준 기술 사카키바라 겐키치

사무라이의 시대 뒤에 찾아온 메이지 시대. 나이 든 마지막 검객이 보여준 기술은?

마지막 검객이 보여준 기술 사카키바라 겐키치

(voive actor) S. Lee

S. Lee

도쿠가와 정권이 일본을 통치하던 에도 시대 말기,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을 보여주듯이 많은 검객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검도 도장을 연 지바 슈사쿠나 모모노이 슌조, 사이토 야구로 같은 사람들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도장에서 수련한 후, 훗날 시대를 이끄는 사카모토 료마나 가쓰라 고고로 같은 인물도 탄생하였습니다.이러한 사람들이 비하면, 최후의 검객이었던 사카키바라 겐키치는 유명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카키바라 겐키치는 정치가나 혁명가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검호, 검객으로 살아갔습니다.사카키바라 겐키치는 1830년 가난한 하급 무사 집안의 후계자로 태어났습니다. 13세에 막부 말기 검의 달인이라 불렸던 오타니 노부토모의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오타니 노부토모 밑에서 눈에 띄게 실력을 키워서 에도를 대표하는 검사가 되었습니다.그 당시, 검술 능력을 승인하는 자격증이나 면허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 지위를 얻기 위해 위해서는 실력과 함께 도장에 지급할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카키바라 겐키치는 가진 돈이 없어 이 면허를 딸 수 없었습니다. 오타니 노부토모는 사카키바라 겐키치를 위해 자비를 들여 면허를 딸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이리하여 공식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사카키바라 겐키치는 도쿠가와 정권의 무사들에게 무예를 가르치던 전문 기관인 고부쇼의 사범이 되었습니다. 사카키바라는 검으로 먹고 살아갈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게다가 1860년에는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가 보는 앞에서, 창술의 명인 다카하시 데이슈와 대전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검과 창의 승부는 그 길이 때문이라도 창이 유리하다고 말해집니다. 불리함을 이겨낸 승리였습니다. 이 승부에 감격한 도쿠가와 이에시게는 사카키바라 겐키치를 쇼군 본인의 지도자로 임명하였습니다. 쇼군에게 검술을 가르친다는 것은 검술 사범에게 최고의 명예입니다. 사카키바라 겐키치는 도쿠가와 이에시게를 목숨 걸고 모셨습니다.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시게는 1866년 병으로 죽고 맙니다. 사카키바라 겐키치는 슬퍼하였습니다. 그 이후, 사카키바라 겐키치는 도쿠가와 정권의 일을 그만두고 역사에서 흔적을 감췄습니다. 작은 도장을 열고 사람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그의 검술 실력을 알게 된 메이지 신정부도 그에게 정부의 일을 권하였지만, 그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사카키바라 겐키치는 조금씩 세상에서 잊혀 갔습니다.1889년, 기오이초 후시미노야스의 저택에서 메이지 천황을 초청한 전람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실력 있는 자들이 모여 무예를 선보였습니다. 이름 높은 검호들 사이에 66세의 사카키바라 겐키치도 있었습니다. 그 사카키바라 겐키치가 메이지 천황 앞에서 보인 눈부신 실력. 주위를 감탄시킨 사카키바라 겐키치의 이야기를 본편에서 확인해보세요.      

100가지이야기소개

도쿄100 이야기 앱 다운로드

주의사항
도쿄 100 이야기는 앱 내 구입방식 입니다.
이용에는 별도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iOS

Download_on_the_Mac_App_Store_Badge_JP_blk_100317 QR_636619

권장 사용 환경

・iOS 10 이상

Android

google-play-badge QR_636619

권장 사용 환경

・Android9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