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도 주오구 긴자로쿠초메
일본 최후의 복수 우스이 로쿠로
무사의 아들, 10살의 우스이 로쿠로가 부모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다
현대의 형법에서 ‘복수’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어떤 상대이더라도 재판으로 형벌을 결정해야 합니다. 재판소를 통하지 않고, 자력으로 누군가에게 제재를 과하는 것 또한 범죄에 해당합니다.하지만 도쿠가와 정권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사의 경우, 가족이 불합리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범인이 체포되지 않았을 때는 자신이 모시는 주군에게 ‘복수’ 허가를 신청합니다. 주군의 허락이 있다면 범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1868년, 치쿠젠(지금의 후쿠오카현) 지역의 아키즈키번에서 우스이 와타리라는 무사가 살해당했습니다. 이 때 우스이 와타리의 아들, 우스이 로쿠로(사건 당시 10세)는 변을 피해 도망쳤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게 되었습니다. 우스이 로쿠로는 복수를 결심합니다. 무사의 아들로서는 당연한 결단이었습니다.이윽고, 범인은 같은 아키즈키번에 있는 간성대 소속 인물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간성대는 세력이 강했고, 반도쿠가와 정권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아키즈키번도 강한 처벌을 내릴 순 없었습니다.우스이 로쿠로는, 번의 재판을 기다리지 않고 범인을 찾아내 복수를 하려 했지만, 아직 검술이 미숙하여 지금 상태로는 오히려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만류하였습니다. 당분간의 검술 수행에 시간을 들였습니다. 수행 중, 간성대 소속 이치노세 나오히사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우스이 로쿠로는, 이치노세 나오히사를 찾아 나섰습니다.시대는 도쿠가와 정권의 에도시대에서 메이지 시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근대화 정책을 펼쳤던 메이지 정부는 법률을 개정하여, 1873년에 복수는 야만적인 행위라며 금지했습니다. 에도시대에는, 복수가 무사의 명예였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의 복수는 살인 사건일 뿐이었습니다.하지만, 우스이 로쿠로는 복수를 위해 일생을 바쳐왔습니다. 새로운 법률을 지키기보다 무사로서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우스이 로쿠로는 도쿄에 올라가 인력거를 몰며 생활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복수 상대에 대한 정보를 찾아 나섰습니다.그러던 중, 부모의 원수 이치노세 나오히사가 재판관으로 재판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부 관료를 죽이면, 그 죄가 더 무거워진다는 것을 우스이 로쿠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메이지 정부 재판관으로 뻔뻔하게 살아가는 이치노세 나오히사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이윽고 1880년 12월 17일, 우스이 로쿠로는 이치노세 나오히사가 구 아키즈키번의 저택 (지금의 도쿄 주오구 긴자로쿠초메 부근)에 바둑을 두러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우스이 로쿠로는 아버지의 유품인 단도를 품에 숨기고, 아키즈키번 저택으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