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도 스기나미구 이마가와 간센지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 - 일족을 남긴 결단, 이마가와 우지자네
가신의 길을 떠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겠다고 판단한 이마가와 가문의 용감한 결단
전투에서 패배한 뒤 미련 없이 할복하는 것,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무사의 이미지입니다. 분명히 그런 무사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았습니다. 수치를 참고 살아 남음으로써 가문을 잇는다는 결단을 내린 무사도 있었습니다.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마가와 우지자네일 것입니다.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이마가와 요시모토라는 무사의 아들이었습니다.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스루가(지금의 시즈오카현의 일부), 도토미(지금의 시즈오카현의 일부), 미카와(지금의 아이치현의 일부)를 통치하던 유명한 무사였습니다. 에도 막부, 즉 도쿠가와 정권을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모시던 주군이기도 하고, 가이(지금의 야마나시현)를 통치하며 일본에서 가장 강한 무장이라고 불리던 다케다 신겐 또한 경의를 표하던 존재였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단순히 강할 뿐만 아니라, 법률을 정비하는 등 정치면에서도 다른 나라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그런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1560년, 교토로 향하던 중, 오와리(지금의 아이치현의 일부)의 유명한 무사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죽고 맙니다. 이 전투를 오케하자마 전투라고 부릅니다. 이 전투에서 이마가와 가문은 힘을 잃고 맙니다.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뒤를 이은 것이 이마가와 우지자네였습니다. 하지만 이마가와 가문 전체를 다스리진 못하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을 떠나 독립하였고,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적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게 됩니다.또한, 다케다 신겐이 이마가와 가문에게 전쟁을 걸어왔습니다. 다케다 신겐은 이마가와 가문과 친척 관계에 있었지만, 약해진 이마가와 가문의 영토를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케다 신겐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간토 지방의 호족, 호조 씨에게 도망쳤습니다. 가문이 멸망해버렸으니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전투에서 죽어야 한다, 할복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겁쟁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목숨을 이어가기로 하였습니다.하지만 호조 씨도 다케다 가문과 동맹을 맺으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교토까지 도망쳤습니다.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이 곳에서 교토의 공가(천황가를 모시는 가신)와의 인맥을 쌓았습니다. 원래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축국(많은 사람이 모여 공을 차며, 지면에 공이 닿지 않도록 계속해서 패스하는 게임)이나 시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공가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한편,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승리하였던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들의 반란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케다 가문도 신겐이 병사한 뒤, 그 뒤를 이은 다케다 가쓰요리의 대에서 멸망하였습니다. 호조 가문 또한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 일본 정치를 이끌게 된 것은 한때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주군으로 모셨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였습니다.예전에 자신과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의 입장이 크게 바뀌었습니다.이렇게 아이러니한 운명과 마주한 이마가와 우지자네. 도쿠가와 정권 밑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기로 하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