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토구 아사쿠사
센소지 역사의 숨겨진 이야기
아사쿠사는 왜 최대 오락지가 된 것인가
지금의 도쿄는 일본의 수도로 발전을 거두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를 정비할 때까지는 사는 사람도 많이 없는 시골이었습니다.사람이 많이 없는 시골 땅을 “구사부카이(풀이 무성한)”라고 합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기 때문에 밭도 논도 집도 없어서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시골 속에서 비교적 풀이 옅은 지역을 “아사쿠사(옅은 풀)”라고 불렀습니다.이 아사쿠사에는 센소지라는 절이 있습니다. 센소지가 지어진 것은 628년입니다. 스미다가와 강에서 생선을 낚던 어부의 망에 관음보살 동상이 걸렸습니다. 이 관음보살상을 모시기 위해 절을 세운 것이 센소지의 시작입니다.이 보살상을 주운 어부의 집을 절로 만든 것이 그 시작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큰 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857년에 교토 히에이잔 엔랴쿠지라는 절의 고승 엔닌이 찾아와 관음상을 만들어 센소지에 모셨습니다. 또, 942년에는 무사시(지금의 도쿄, 사이타마) 지방을 다스리던 히라카마사가 센소지를 크게 만들었습니다. 가미나리몬도 이 시대에 지어진 것입니다.사실 이때 간토에서는 다이라노 마사카도라는 무장과 조정(중앙정부)이 대립하여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이라고 불리는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940년에 끝났는데 이 전투로 인해 센소지도 황폐해지고 말았습니다. 이 센소지를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재건하였습니다.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이 센소지를 권력자들도 소중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가나가와현의 가마쿠라를 중심도시로 하여 일본의 정치를 담당하던 가마쿠라 막부도 센소지를 소중히 생각하였습니다. 가마쿠라에는 쓰루오카 하치만구라는 신사가 있는데 이 신사를 세우는 것도 센소지를 복구한 기술자가 담당하였습니다.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를 본거지로 하였을 때, 센소지를 도쿠가와 가문이 기도를 올리는 곳으로 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센소지는 긴 역사 속에서 몇 번이고 화재의 피해를 보아 건물이 망가졌습니다. 그때마다 이에야스 가문을 재건을 위해 힘썼습니다. 삼대째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오중탑과 본당을 재건하였습니다.이렇게 도쿠가와 가문이 소중히 생각했던 센소지에는 많은 서민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참배객을 대상으로 한 차, 과자, 식사,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풍경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도쿠가와 가문이 센소지를 소중히 생각하여 자주 찾아온 것이, 사실 센소지를 예능의 마을, 엔터테인먼트의 마을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아사쿠사는 어떻게 예능 마을이 된 것일까요?